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훈춘 사건 (문단 편집) ==== 훗날 추가된 증언 ==== 훗날 이범석 장군은 일본군이 마적을 시켜서 훈춘을 공격했다는 회고록을 남겼다.[* 이범석, (鐵驥)李範奭自傳 : 우둥불 後編, 외길사, 1991, 196~200] 그런데 이건 나중에 갑자기 추가된 내용이다. 우둥불 때만 해도 그런 내용이 없었다. 아래는 그 내용이다. >『당시 이 문제 이외에 객관적인 우리 독립운동과 직결되는 중대한 사건이 만주에서 발생했다. 곧 훈춘사건이다. >훈춘 사건은 본래 일인이 조작하여 일인이 제작기 노는 연극에, 맹랑한, 뜻하지 않은 타격을 받고 토벌군을 토벌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결심을 한 데서 일어난 것이다. >[[3·1운동]]이 동기가 되어 요원의 불길처럼 퍼지던 국내 독립운동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그 중심이 북으로 이동, 간도에서의 독립운동으로 중량이 옮겨졌다. 서쪽의 독립운동은 무형한 정신 문제이었고, 동북쪽의 즉 북간도의 독립운동은 육속 무기를 입수하여 본격적인 무장활동을 벌이는 적극활동이었으므로 일제가 특히 위험시했다. >이제는 국내의 [[라남구역|나남]]·[[청진시|청진]] 에다가 경비를 강화하는 동시에 두만강 남안에 철통같은 경비를 해놓고서도 북간도에서는 커가는 독립군 세력을 어쩔 수 없으니 박멸하겠다는 생각에 몰두했다. >그래서 한 방법으로 외교적 분쟁의 구실을 만들기로 했다. 즉 친일 마적에게 돈을 주어 선동·유혹하며 그들로 하여금 훈춘성을 습격시켰다. 이를 구실 삼아 대규모 출병의 길을 트려는 간계에서였다. >한 마디로 훈춘사건은 일제가 만주침략과 독립군 토벌에 대한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조작한 속임 사건이다. 일제는 그전부터 [[장작림]]정권에게 독립군 토벌을 강요했으나 [[장작림]]은 이 핑계 저 핑계로 불응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장작림]]은 독립운동을 동정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간도에는 워낙 한국인이 많아 마음대로 할수도 없었다. >이에 초조한 일제는 만주의 일부 마적을 사주하여 독립군을 사살하면 돈을 주겠다고 하며 무기까지 대주었다. 그럼에도 독립군이 팽창해 가니까 출병을 위한 구실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건의 오리지날 스토리는 마적 일부를 독립군으로 위장시켜 훈춘을 들이치게 한다는 소재인지 프로트인지이다. >위장한 독립군, 즉 미리 짜놓은 마적이 들이쳐오면 일본경찰은 성문을 열어주고 다른 성문으로 도망가고 들어 온 마적은 영사관을 습격, 기물을 파괴하면 국제적 문제가 될 것이고 일본측이 곧 중국측에 엄중항의 하고는 출병의 구실을 만들 수 있다는 계산의 각본이다. 일본이 사주한 마적단의 두목을 장강호라고 하는데 일설에는 그가 일본인이라고도 한다. 그리소 사건의 발생이 10월 하순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 같은데 내 기억으로는 9월 하순이 아닌가 생각된다. (날짜는 아마 기록이 내 기록보다 정확할는지 모른다.) >훈춘은 일본인 [[원세개]] 정권과 체결한 소위 21개 조약-만주의 장작림 정권에 강요하여 체결한 24개 조약에 의거, 만주에의 일인 상주 치외법권을 누린다는 것-에 다라 일인의 큰 거주지가 있고 일인 교민을 보호한다는 구실아래 총영사관과 경찰로 불리는 무장인원이 일개중대 약 5,60명 주둔하고 있었다. 또한 중국군은 약 1개 대대병력이 있었다.』 분명 이전의 회고록에선 "중국 랴오닝성의 안투센의 지방 보위단과 일부 애국 청년들"이 "한인과 연합의용군을 조직"해서 "한국 지사 10여명과 더불어 훈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여, 저항하는 일본 경찰 30여명을 살해하고 그 영사관 창고 안에서 그들의 만주 침략의 철중인 대량의 무기를 색출"이라고 증언해 놓고 갑자기 "친일 마적에게 돈을 주어 선동·유혹하며 그들로 하여금 훈춘성을 습격", "마적 일부를 독립군으로 위장시켜 훈춘을 들이치게 한다"는 이전의 회고록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증언이 추가됐다. 그런데 여기서도 일본 영사관을 공격한 건 한인이라고 증언했다. >『이 음모에는 일본 총영사관과 일본 경찰을 파괴, 살해하며 아주 쑥밭으로 만들라고는 아니했다고 상식으로 이해가 될 것이다. 아마 극히 소수의 피해는 다짐 안했겠지만. >그런데 역시 마적은 마적끼리 통했다.비록 친일마적에게 비밀히 지시한 음모였지만 우리 독립군과 관계가 긴밀한 정의파 마적의 일부에서 그 소식을 들었고 우리가 캣취했다. >저쪽에서 준비한 행동의 날짜가 닥쳤을 때 친일마적이 훈춘성을 습격하는 줄 알고 약속대로 일인이 성문을 열고 먼저 맞이한 것은 반일 마적이었다. >__정의의 마적들은 다짜고짜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고 일본 경찰을 몰살시키고 동시에 일본 영사관 관원의 가족을 송두리째 죽여버렸다. 영사관 지하실에 모아두었던 1개 전투대대분의 6,7백정의 무기도 모두 약탈하고 영사관에 갇혀있던 우리 애국지사 수명을 모두 석방했다.__ >__이 마적의 지휘자는 대암괴라는 중국 사람으로 안도현, '''민병대-지방자위대-대장'''이었다.__ >그 때 중국의 각 지방자위대는 자위를 위해 마적들과 연락하는 모순된 자세를 가진 수가 많았다. 대암괴도 역시 백두산 밑 산악지대의 한 현이고 마적 출몰이 가장 많은 지역을 근거지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 마적들과 긴밀한 연락을 갖고 있는 자위대 지도자였다. >마적들과 「안도현만 침입하지 않으면 우리도 너희들을 적극 토벌하지 않는다.」는 호불침조약 비슷한 약속을 맺고 평온을 유지하던 중 그런 정보를 얻고, 좋다구나 나도 행동을 같이하자고 제의, '''자위대원 일부를''' 이끌고 마적과 같이 행동했던 것이다. >그 후에도 대암괴라는 사람은 독립군과 긴밀한 협력을 계속했는데 그 배후에는 그의 부인인 한 한국여인이 있다. 이 여인의 지극히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대암괴가 독립군에 협력해 준 원천이었다. 자위대장인 남편을 설득해서 자위대를 이용하여 그와 같은 일을 하게 했다. >그 후에도 그 변방에 있는 우리 교포들을 힘 자라는 데 까지 대암괴 내외가 도와주고 보살펴 주었다. 한국 여자의 위대한 애국심의 발로이다. >그 후 청산리전역 때도 대암괴가 일군의 행동을 감시, 정찰해서 늘 우리에게 끊임없이 연락해 주어 우리는 적지 않은 작전상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훈춘사건은 일인의 본래 뜻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수 많은 일인이 죽고 총영사관이 결단이 나고 내부에 비법적으로 남의 나라 영토 안에서 음모를 꾸미려고 암장해 놓았던 많은 무기가 약탈 당함으로써 일본의 죄악이 백천백일하에 드러났다.』 >이범석, (鐵驥)李範奭自傳 : 우둥불 後編, 외길사, 1991, 196~200 이 부분은 이전의 회고록인 "우둥불"과 일치하며 특히 지방 민병대와 같이 했다는 부분이 일치한다. 정작 한국독립군이나 중국 측 문서에는 한국독립군 측의 사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